타락한 신에서
굿 타이탄으로
“돈 되는 사업 다 했고, 뇌물도 서슴없이 줬다” 2000년대 초반까지 지멘스를 평가하는 말이다. 2006년 지멘스는 약 7천억 원에 육박하는 비자금을 조성해 각 국가의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뿌린 사실이 적발됐다. 10억 유로가 넘는 벌금도 문제였지만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업 신뢰도는 더욱 큰 문제였다. 급기야 지멘스 역사상 첫 외국인이자 외부인 최고경영자가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새로 들어온 페터 뢰셔 회장은 강력한 클린 비즈니스와 무관용 정책을 추진하고 전담 준법감시인 제도를 도입했다. 이미지 개선을 위해 1억 달러가 넘는 지원금을 부패 척결을 위한 비영리기관에 투자했다. 또 환경 이슈에 집중해 에너지 효율이 높고, 친환경적인 제품 개발에 포트폴리오를 집중해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덕분에 2017년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 1위에 선정되기까지 했다. 준법 경영과 환경 경영의 선두 주자로 올라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PoF 프로세스
지멘스 위기 탈출의 수훈갑을 꼽자면 이러한 이미지 개선 외에도 하나의 시스템이 더 있다. 바로 지멘스 PoF(Pictures of theFuture) 프로세스다. 2000년부터 도입하여 2004년부터 본격 적용되기 시작한 이 프로세스를 통해 지멘스는 사업영역별 장기적인 미래상을 구체화해 현 사업 분야의 중기전략의 한계를 보완하고 전략적 비전을 수립했다. 특히 사업 포트폴리오의 조정, 신사업의 발굴, 연구·개발(R&D) 등 핵심 분야의 의사결정에는 반드시 PoF프로세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멘스는 2017년 매출액 831억 유로, 영업 이익률10%를 기록하는 등 초우량 기업으로 거듭났다. 4차 산업혁명의 본격화로 기업 여건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기업예측에 기반한 전략적 대응이 성공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상설 시장 조사
조직으로 미래 예측
그렇다면 어떻게 정확한 미래 대응이 가능했을까? 보통 중장기 전략은 뜬 구름 잡는 목표를 나열하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많다. 또한, 미래시장 예측 또한 대부분 외부 예측이나 컨설팅 기관에 의존하여 비주기적으로 예측하기 때문에
기업의 상황에 맞는 예측이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지멘스는 상설PoF 조직과 현업 부서 담당자가 TF조직을
결성해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 지멘스는 한 가지 PoF 테마를 다루는 데 PoF팀과 사업부서의 리서치팀이
전담TF를 구성해 적어도 6개월 이상을 소요하여 결론을 내리며 전 세계의 과학자와 기업,
정책입안자를 대상으로 100회 이상의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멘스의 PoF 설계자인 스투켄슈나이더(Stuckenschneider)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PoF의 성공 비결을 “다른 기업의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알기 위해 책을 보는데 지멘스는 기술자와 사업가가 함께 미래상을 만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준비된 미래를 더욱
더 강하게 하는 힘,
비전 공유
지멘스의 PoF는 다양한 시나리오 작업으로도 유명하다. PoF는 가장 먼저 로드맵 작성후에 다양한 거시적·미시적 요소들이 각 사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폭넓게 조사하여 시나리오화한다. 그리고 시나리오 속 상황에 따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도전 과업을명확히 하는 과정을 거쳐 전략적 비전을 결정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위기 상황들은 미리 검토해 준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위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 특히 지멘스는 구체적인 미래상을 만들면서 조직원들과 소통하며 전략을 공유하는 툴로 활용했기 때문에 조직원들 사이에서 비전의 공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에 투자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으며, 잘 나가는 사업을 매각하면서도 더 나은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동일한 미래를 예측해도 한 기업은 기회로 다른 기업은 위기로 볼 수 있으며, 대응 전략이 같아도 경영진과 조직 역량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