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자’라는 자부심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 명장이자 현대자동차 급발진 사고(2015), 독성 메탄올 워셔액 사건(2016), BMW 화재 사건(2018) 등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소신을 가지고 소비자의 입장을 대변한 박병일 명장(카123 TEC 대표). 방송에도 다수 출연해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사로 나섰던 그를 본 사람들은 자동차 분야의 박사, 혹은 해외 유학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박병일 명장의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최고 수준의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이들에게 국가가 수여하는 기술 분야 최고의 명예인 ‘명장’이라는 호칭을 얻은 그의 무기는 학력이 아닌 ‘기본’을 지키는 일. 기술에 대한 자부심, 끊임없이 갈고 닦은 기초, 명장의 자세, 그는 이 세 가지의 기본을 엔진으로 삼아 꿈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 같았다.
“저는 흔히 말하는 정통파가 아닙니다. 대학에서 자동차를 전공하기는커녕 중학교 중퇴니까요. 그런데 제가 기술을 막 배우기 시작할 무렵, 당시 사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의사는 사람 한 명을 고치지만, 자동차 정비사는 한 가족의 생명을 책임지는 거라고요. 그때부터 볼트 하나하나에 사람의 생명이 달렸다는 마음으로 자동차를 정비했죠.”
자신의 정비로 한 가족을 살린다는 ‘자부심’. 1999년, 세계 최초로 자동차 급발진을 분석했던 이유도 기술자로서의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비공으로서 ‘저거 내가 한번 보고 싶은데?’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박사, 전문가도 못 하는데 정비공이 어떻게 하느냐는 편견도 깨고 싶었죠.”
모두가 안 된다고 했을 때 그는 보란 듯이 급발진 원인을 분석하고 재연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박병일 명장은 3년 뒤인 2002년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 명장’이 되었다.

자부심, 기초로 기르다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키우던 박명일 명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버스 정비공장에 입사했다.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 붓 대신 공구를 잡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을 하도 못하니까, 하루는 절 가르치는 기술자가 창고로 부르더라고요. 따라가 보니까 창고 불을 끄고는 냄새로 오일 종류를 맞히라는 거예요. 하나도 못 맞혔죠. 그러니까 그분이, ‘일하면서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보기엔 전 절대 기술자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미 학교를 자퇴한 데다 책임져야 할 동생이 다섯이나 있던 소년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때, 운명처럼 그의 가슴을 울린 문장이 있었다. 우연히 미국의 전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전기를 읽은 것이다.
“‘꿈은 버리지 않으면 얻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가능하다면 나에게도 가능하다.’ 그 문장이 제 마음을 울리더라고요. 링컨이 23세에 정치에 입문해 30년 만에 미국 대통령이 됐잖아요. 그 문장을 보며 결심했어요. 나도 30년 안에 자동차로 뭔가 이루겠다. 내가 이 업계에서 1인자가 돼보겠다.’ 그런 꿈을 가졌죠.”
그 뒤로 사장의 눈을 피해 몰래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가기도했고, 청계천에 있는 헌책방을 매일 돌아다니며 자동차 관련 책을 모조리 수집했다. 어렵게 자격증을 딴 뒤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공부가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기출문제 위주로 익히면 되지만, 정말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새로운 공부가 필요했던 것.
“일상생활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정비에 사용했어요. 제가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할 때는 정비 관련 데이터가 없었죠. 다들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 엔진이 왜 고장 났는지, 이 타이어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판단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의사를 보니까, 병에 대한 데이터를 갖고 환자를 진찰하더라고요. ‘왜 우리 정비는 그렇지 않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직접 데이터를 수집했죠. 그다음부터 타이어의 마모 상태를 보고 그 타이어가 얼마나 달렸는지, 남은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판단했어요.”
박병일 명장의 열정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2~3년 동안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면 일본에 가서 기술을 공부하고, 다시 돌아와 또 돈을 모은 뒤에는 독일에 가서 기술을 배우는 것을 반복했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다른 환자의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일한다면 그 의사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정비사도 마찬가지예요. 정비사는 자동차를 고치는
의사잖아요. 제대로 하면 손이 더러워질 일도,
다칠 일도 없어요. ”

소통이라는 기본자세

오랜 세월 자동차 정비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박병일 명장의 손은 손톱 밑에 기름때가 낀 자국 하나 없고, 흔한 상처도 없다. 결조차 부드러워 보이는 손은 안전한 정비와 고객간의 신뢰를 위해 박병일 명장이 강조하는 기본자세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다른 환자의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일한다면 그 의사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정비사도 마찬가지예요. 정비사는 자동차를 고치는 의사잖아요. 제대로하면 손이 더러워질 일도, 다칠 일도 없어요.”
고장 부위에 대한 차근한 설명과 확실한 사후 처리 등, 고객과의 실시간 소통 역시 그가 강조하는 정비사의 기본자세. 박병일 명장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리콜 사태가 자주 발생하는 것도 설계자와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 그리고 기업과 협력업체, 고객 간의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판매용 자동차와 수출용 자동차의 안전성 차이 문제가 꾸준한 화제인데요. 나라별 규정이 다르기에 차를 만드는데 안정성이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고객들이 이를 뒤늦게 깨닫고 부당함을 항의하기 전에 기업들이 솔직히 인정하고 더 안전한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의 기술자, 자동차를 실제 사용하는 고객과 소통을 많이 해야 하죠.”

최고의 기술자, 다시 꿈을 꾸다

자동차는 1886년 최초로 발명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이제 화석연료 기반이 아닌 모터 기반의 자동차가 나오고, 자율주행차, 스마트카 등 새로운 자동차의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박병일 명장은 어떤 형태든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한 정비소의 모습은 그대로일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전자화, 프로그램 관련 기술을 공부해야 기술자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이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박병일 명장은, 나아가 ‘기술 로펌’을 세우겠다는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었다.
“지금 짓고 있는 새 공장의 4층을 기술 로펌, 기술연구소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억울한 일이 생기면 로펌을 찾아가듯, 기술적인 어려움이 생길 때 고객에게 자문을 주고 싶어요. 기술자들에게 퇴임 이후의 삶이 있다는 메시지도 전달하고 싶고요. 또 후진 양성에도 힘쓸 생각입니다. 우리 기술자들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줌으로써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거든요.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편리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세상이 알게 하고 싶고요.”
모두가 비웃었던 1인자의 꿈을 보기 좋게 성공시키고, 또 새로운 꿈을 꾸는 박병일 명장. ‘안 된다’는 말을 제일 싫어 한다는 그는 오늘도 ‘기본’이라는 엔진을 달고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