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몰랐을 터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터틀넥’이 이토록 일본에서 사랑을 받게 될 줄 말이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가 최근 도쿄도청에 터틀넥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다른 의미다. 미안한(?) 말이지만, 아나운서 출신의 고이케 지사의 패션 센스 때문에 유행이 인 건 아니다. 날이 추워지면서 고이케 지사가 ‘터틀넥을 입자’고 운동에 나서면서다. 이유도 있다. 여름엔 시원한 출근 복장을 입자는 게 ‘쿨 비즈(cool biz)’라면 겨울엔 따뜻하게 출근복을 입자는 것이 ‘웜 비즈(warm biz)’인데, 이 웜 비즈 일환으로 입어 보자는 거다.
그런데 한 발 더 들어가면 안타까움이 인다. 따뜻하게 입고 다니자는 것인데, 이유가 있다. 전력 때문이다. 전기를 아껴야 하다 보니, 난방 온도를 높일 수가 없다. 그러니 관공서 입장에선 직원들에게 “따뜻하게 입자”라고 말할밖에. 직접 터틀넥을 입고 마이크 앞에 선 고이케의 말이다. “목을 따뜻하게 하면 방한 효과가 높습니다. 겨울 절전에 솔선수범하겠습니다.”
리더인 고이케를 따라 도쿄도청 공무원들은 일제히 터틀넥을 12월 1일부터 내년 3월까지 입기로 했다. 이 기간은 일본 정부가 발표한 절전 강화 기간. 난방 기구를 적게 돌려서 전기 사용을 줄이자는 건데, 고이케 지사는 유럽서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터틀넥을 애용한다고 했다.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에 프랑스도 전기를 아끼기 위해 터틀넥을 입기 시작한 것으로 프랑스는 공공시설 난방 온도를 19도로 제한하고 있다. 화장실 온수를 끊거나 심지어 지하철 운행 속도까지 늦추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전기를 아껴 쓰자고 하는 건 사실 큰일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절전 운동은 강도가 다르다. 2015년 이후 7년 만의 일로, 아껴 쓰지 않으면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우선, 전력난 이야기부터.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면서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줄여 왔다. 총 발전량의 30%를 담당하던 원전 대신 전력 생산의 축이 된 것이 바로 화력발전소다. 말하자면 석탄을 태워 전기를 만들어 온 것인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원자잿값이 고공 상승을 하면서 화력발전에 소요되는 비용이 급증했다. 게다 화력발전소가 노후화했다.
올여름, 일본 정부는 처음으로 기업과 가정에 절전해 달라고 요청에 나섰다. 40도에 육박하는 여름에 에어컨을 덜 틀어 보자는 이야긴데, 실제로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지난 7월 일본의 전력공급예비율은 3%대에 불과했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빼고는 일본 전역에 전기가 부족해 대규모 정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일자, 경제산업성이 전기를 아껴 달라고 나섰다. 발전소가 하나라도 멈추면 정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 때문에, 가동을 중단하려 했거나 중단했던 노후 화력발전소도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당초 당시 경제산업상이었던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마저 화력발전소 재가동에 “은퇴한 선수를 그라운드에 불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던 일까지 벌어진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름만이 아니었다. 여름만큼 전기 사용이 많은 겨울을 정전 없이 보내는 것이 중요해졌다. 도쿄에선 2023년 1월과 2월이 위기로 꼽힌다.
일본은 가정용 전기요금을 규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 비용 상승에 버티기 힘들어진 전력회사들은 전기료 인상 시도에 나서고 있다. 최근 정부에 가격 인상 시도를 한 곳은 도호쿠전력. 내년 4월부터 일반 가정용 전기요금을 평균 32.94% 올리겠다고 경제산업성에 신청했다. 도쿄전력 등 나머지 전력회사들도 입을 맞춘 듯이 일제히 요금 인상 신청에 들어갔다. 지난여름부터 이번 겨울까지 그나마 ‘공급 여력’이 있는 곳이었던 오키나와전력도 이 행렬에 동참했다. 내년 4월부터 가정용 전기요금을 39.3% 올리겠다는 내용으로, 이대로라면 내년 4월엔 지금보다 훌쩍 오른 전기요금 고지서가 날아들게 됐다.
전력 부족과 가격 인상에 기업들은 더 어려운 상태다. 일본 니가타(新潟)현 북동쪽에 있는 아가노(阿賀野)시. 이곳에 있는 오래된 놀이공원 선토피아월드는 올여름 회전목마에 있는 전구 수를 3분의 2로 줄였다. 전기요금 때문이다. 지난해엔 1,820만 엔(약 1억7천만 원) 정도였던 연간 전기요금이 올해 들어 2배로 올랐다. 일본은 전력시장을 자유화해 일종의 ‘도매상’을 통해 전기 사용 계약을 맺도록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전기요금이 더 빠르게 급증하게 됐다. 전력거래 시장에서 가격이 3배 가까이 오르면서 일반 계약자들에게 그대로 비용 전가가 이뤄진 셈이다. 이 때문에 일부 지하철역에선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운행을 줄이고, 슈퍼 등에선 매대 조명을 끄는 곳도 생겨났다.
안 그래도 고물가에 고통받고 있는데, 이미 30% 오른 전기요금이 또다시 대폭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고심하던 일본 정부, 눈을 돌린 것은 다시 원전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원전 가동 연한을 40년으로 정하고, 단 한 번에 한해 20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해 왔는데, 이 규제를 풀어 원전 가동 기간을 늘리겠다는 거다. 원전 가동을 30년을 기점으로 최장 10년에 한 번 점검해 운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데, 이 법이 통과되면 원전 수명 규제가 사라지게 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전력을 아끼면 포인트로 돌려주겠다며 일본 정부는 돈을 풀기로 했다. 뿐만인가. 원전 가동 시간도 늘리기로 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전력 부족은 ‘터틀넥’으로 해결하자고 한다. 그런데 진짜 이게 최선일까?
자율주행 전기차, 스마트폰처럼 기술이 진화할수록 전기로 이뤄지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전기는 인류에게 필수 에너지인데, 정작 일본 정부가 내놓는 수많은 에너지 대책 중에선 저전력 기술 투자, 대체에너지 기술, 에너지 효율화 개발 투자는 빠져 있다. 터틀넥으로 겨울을 나자는 도쿄도지사의 전력 절감 운동이 씁쓸한 이유기도 하다. 세금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의 터틀넥 소동, 남의 일만은 아니다.
글·사진
김현예 중앙일보/JTBC 도쿄특파원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국제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경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2011년 중앙일보에 입사, 사회부와 산업부, 데이터저널리즘팀 등을 거치고 현재 일본도쿄특파원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