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기획이나 정책 수립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술 개발에도 트렌드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트렌드 분석에 앞서 트렌드를 예측할 방법은 없을까요? 선제적인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말이죠.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선 트렌드 예측을 위한 ‘이머징 이슈(Emerging issues)’ 연구가 활발한데요. 국내에서도 최근 유사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고 해 그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이머징 이슈
이머징 이슈란 장차 사회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일으킬 사건이나 기술 등을 말합니다. 10여 년 후에 등장할 트렌드의 동인이라 보면 됩니다. 가장 큰 예로는 1969년 미국 국방고등연구기획국(DARPPA)에서 등장한 아파넷(ARPAnet)이 있습니다. 컴퓨터공학자 릭라이더가 동료들에게 컴퓨터가 연결된 상태를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며 이를 아파넷이라 소개했는데, 훗날 인터넷의 기원이 됐죠. 아파넷의 사례를 보면 이머징 이슈의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퓨처스 브리프
이머징 이슈는 눈앞에 명징하게 드러나 보이는 트렌드만큼 통계적 추세나 증거가 명확하진 않아 포착이 어렵지만, 그 파급력 때문에 다양한 국가에서 연구하고 있죠. 우리나라에도 국회미래연구원이 2018년 설립 때부터 이머징 이슈를 연구하고 있는데요. 최근 미국의 학술잡지 ‘네이처’, 과학기술 전문지 ‘와이어’와 싱가포르, 캐나다, 미국, 일본의 정부 기관 등에서 출간한 자료들을 참고해 퓨처스 브리프(Futures Brief)라는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주거, 기술, 환경 등을 주제로 총 9개의 이머징 이슈를 소개했습니다.
앤스로포즈(Anthropause)
인류를 뜻하는 ‘anthro’에 멈춤을 뜻하는 ‘pause’가 합성된 단어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이동과 활동에 제약이 나타나는 현상.
소셜 버블(Social bubbles)
방역과 지역 폐쇄로 스트레스를 느낀 사람들이 정서적 유대를 위해 일종의 방어막을 치고 모인다는 뜻.
줌 타운(Zoom Towns)
화상채팅 툴의 보급으로 재택근무가 늘어나며 근로자들이 교외로 집을 옮기고 이에 따라 새로운 주거지역이 형성되는 현상.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융합을 위해 생활 공간에 센서를 설치하고 센서를 통해 AI가 공간을 관리하는 기술.
스프린터넷(Splinternet)
세계와 연결이 분리된 인터넷을 의미하는 단어로, 코로나19 방역으로 국가의 역할이 비대해지며 국가가 인터넷 망을 통제하는 등의 반세계화 현상이 나타남.
생물감시 정권(Bio-surveillance Regime)
인수 공통 감염병의 증가로 동식물을 포괄한 생물체 감시체계의 필요성이 국가 단위로 대두. 이미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가 이러한 시스템을 구축함.
바이오와 디지털의 융합(Biodigital Convergence)
생물학적 두뇌를 갖춘 로봇, 디지털 뇌와 생물학적 몸이 결합된 기계 등 기계와 생명체가 융합되고 있음.
전체 게놈 합성(Whole-Genome Synthesis)
생명 정보와 구성 요소를 바탕으로 기존 생명체를 모방해 변형시키는 기술.
순환경제의 귀환(Return of Circular Economy)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와 원자재의 수요가 상승하면서 폐기물을 원료로 재사용하는 등의 움직임이 활발해짐.
#미래 기술
9가지 이머징 이슈 중 기술 분야의 이슈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바이오와 디지털의 융합’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개인도 두 기술을 융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특정 생체 조직을 프린터로 생산하는 바이오 프린터의 보급으로 합성 생물학을 집에서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는 거죠.
‘전체 게놈 합성’은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에서 10대 유망 기술로 소개되기도 했는데요. 게놈은 한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 정보를 말합니다. 기존의 유전학은 유전 정보를 읽어내는 데 집중했다면 최근에 등장한 합성 생물학은 공학적 관점을 도입해 게놈 전체를 인공적으로 설계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스위스 등에서 유전자 합성을 통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세포를 탄생시킨 사례가 있죠. 이러한 발전이 계속된다면 게놈 설계로 인간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이지만요.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하던 지난해 언론에서 자주 보이던 사진이 있었죠? 황사가 걷혀 파란 하늘이 드러난 중국 상공의 사진입니다. 다른 국가의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교통량이 크게 줄었고 공장 가동률도 떨어졌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국제 에너지 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세계 에너지 수요
영국 석유 회사인 브리티시 페트롤늄(BP)이 최근 ‘연례 에너지 리뷰’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전 세계 에너지 수요가 4.5% 감소했고, 탄소 배출량도 6.3% 감소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분야는 원유였는데요. 지난해 원유 소비가 하루 901만 배럴(9.3%) 감소해 2011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고 하네요. 에너지 수요가 줄었으니 탄소 배출량도 자연히 감소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하네요. 보고서는 1973년 석유수출금지파동, 2011년 일본 후쿠시마원전사고 등 세계 산업에 큰 혼란을 일으켰던 사건들을 거론하며 이번 현상이 그 모든 사건을 압도할 만큼 여파가 컸다고 덧붙였습니다.
#재생 에너지
에너지 분야 전반의 수요가 감소한 가운데 홀로 증가세를 보인 분야가 있었는데요. 바로 재생 에너지입니다. 작년 한 해 수력을 제외한 재생 에너지 수요가 9.7% 증가했다고 합니다. 코로나19 유행 전과 비교하였을 때 증가율에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하니 코로나19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히 성장한 셈이죠. 유독 재생 에너지 분야에 타격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그린 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세계적 추세 자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오히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해외 각국이 녹색 성장을 천명하며 경기 부양책으로서 재생 에너지 투자를 늘리고 있어 시장은 빠르게 성장 중입니다.
연도별 재생 에너지 수요 변화
#회복
올해 4월, 국제에너지기구가 2021년 세계 에너지 수요 동향을 발표했는데요. GDP가 회복됨에 따라 세계 에너지 수요도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2020년 대비 4.6% 증가하고 2019년보다도 0.5%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특히 재생 에너지의 경우 1970년대 이래 최대 증가폭을 기록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코로나19에도 재생 에너지 산업의 성장은 한동안 지속되겠네요.
올해 상반기 국내 IT 기업들이 수천억 원을 들여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거나 증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작년에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해외 기업이 서울에 데이터 센터를 지을 예정이라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죠. 클라우드 서비스와 AI 기술의 보급으로 데이터의 양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 센터는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그런데 이 데이터 센터가 온난화의 원인으로 지적받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초대형 데이터 센터
미국 시장조사업체 시너지리서치그룹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초대형 데이터 센터가 지난해 기준 597개에 달한다고 하는데요. 이 데이터 센터들은 최소 10만 대 이상의 서버를 보유한 곳들입니다. 이 데이터 센터에서 소모하는 전력량은 일부 국가의 총 전력 소비량에 맞먹는 양이라고 하네요. 게다가 데이터 센터의 열을 식히기 위해 사용하는 냉각기에서 상당한 양의 프레온 가스가 배출된다고 해요.
#나틱 프로젝트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국내외 IT 기업들은 친환경적인 데이터 센터를 짓고자 노력 중입니다. 구글은 데이터 센터의 냉각 시스템에 AI 기술을 적용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아일랜드나 핀란드와 같은 서늘한 기후의 북유럽에 데이터 센터를 짓고 있는 기업들도 많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발 더 나아가 해저에 데이터 센터를 짓고 있는데요. 2015년부터 진행된 ‘나틱 프로젝트’는 2020년 864대의 서버와 냉각 시스템을 장착한 12m 길이의 데이터 센터를 스코틀랜드 오크니섬 해저 36.5m 지점에 설치해 실증하는 작업을 마쳤습니다. 2년간 시험 운영해본 뒤 미국 태평양 연안 해저에 데이터 센터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탄소 중립
친환경을 위한 IT 기업들의 노력은 그린 데이터 센터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이들은 탄소 배출 없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겠다며 ‘탄소 중립’을 선언하기도 했죠. 애플과 구글은 10년 안에, 아마존은 2040년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IT 기업의 친환경 정책은 앞으로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7월 14일, 유럽연합이 기후기본법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담은 정책 패키지인 ‘핏포55(Fit for 55)’를 발표했는데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탄소 국경세뿐만 아니라 탄소 배출권 거래제(ETS), 그린 수소 생산, 내연기관차 판매 중지 등 기존의 환경 정책들까지 하나의 법안 안에 담아 그 영향력을 강화했죠.
이러한 규제는 당장은 기업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패러다임은 비용 절감이 아닌 온실가스 감축에 우선순위를 두는 쪽으로 이미 변화하고 있습니다. 기업에게도 새로운 대응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죠. 탄소 배출권 판매로 지난해 흑자를 달성한 테슬라를 참고해볼 수 있겠네요. 친환경 기술 개발이 기업의 자산이 되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