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첼리스트 최하영 등 올 상반기에만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37명의 한국인이 입상을 하며 K-Classic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마음에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생기다가도, 막상 들어보려 하면 어렵게 느껴지죠. 클래식 음악가들의 삶과 함께 그들의 음악을 접한다면 훨씬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무르익어 가는 가을,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에 빠져 보세요.
클래식 음악은 제목부터가 참 길고 어려워요. 알 수 없는 용어들과 알파벳,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죠. 이 제목의 의미부터 살펴볼까요? ‘소나타’라는 용어는 많이 들어 보셨을 거예요. 소나타는 악기로 연주하는 기악곡의 형식 중 하나인데요. 서로 다른 2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것이 합쳐지며 절정을 이루다 처음과 같이 마무리되는, 클래식 음악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입니다. ‘교향곡’은 오케스트라(관현악단)를 위한 소나타 형식의 작품을, ‘협주곡’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협주하는 작품을 말합니다.
제목에 있는 알파벳 중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건 ‘Op.’입니다. Op.는 ‘작품’이란 뜻의 라틴어 opus의 줄임말로, ‘Op.4’라고 되어 있으면 작품번호 4번이란 뜻이죠. Op.가 아닌 다른 알파벳 기호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바로 각 음악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음악학자의 이름을 딴 것이에요. 예컨대 리스트의 작품에 붙은 ‘S.’는 험프리 설(Humphrey Searle)을, 하이든의 작품에 붙은 ‘Hob.’은 안토니 판 호보켄(Anthony Van Hoboken)을 뜻하죠. 이외에 ‘WoO.’가 붙은 제목도 있는데요, 이는 독일어 Werke ohne Opuszahl의 줄임말로 ‘작품 번호가 없는 작품’이란 뜻이에요. 위대한 음악가들이 남긴 작품이 너무나 많다 보니 제목이 길어지고 말았는데요, 일단 대략적인 의미만 알고 시작해 보도록 해요.
폴란드 출신의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쇼팽의 작품은 아주 시적이고 우아하며 매혹적입니다. 타고난 피아니스트로서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도 많이 써서 지금도 프로 피아니스트들에게 쇼팽의 작품은 정복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죠. 이렇게 아름답고 섬세한 음악을 통해 당시 쇼팽은 파리 살롱에서 펼쳐진 음악회에서 피아노의 시인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은 것은 물론이죠.
그런데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때론 예민하기까지 한 그가 사랑에 빠진 여인은 바지를 입고 시가를 피우는 페미니스트인 데다 이혼한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녀도 둘이나 있는 조르주 상드였습니다. 쇼팽에게 먼저 고백을 한 그녀는 평생을 폐결핵에 시달리던 쇼팽을 살뜰히 보살피며 마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베풀었고, 쇼팽도 그런 그녀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답니다. 상드의 자녀 문제로 9년 만에 파국을 맞고 말았지만요. 상드와 헤어진 쇼팽은 급격하게 건강을 잃기 시작했고, 39세가 되던 2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모차르트는 음악적 성과와는 정반대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오케스트라 부악장이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간파하고 아들의 교육에 헌신했는데, 그 방법이 조금은 강압적이었어요. 여섯 살부터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다니며 정규 교육을 받지도, 또래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고, 때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죠.
이러한 성장 환경 때문인지 모차르트는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클레멘티와의 연주 대결 후 밤낮없이 연습해서 겨우 저 정도 연주를 한다며 비아냥대거나 사촌과 주고받은 편지나 가사 속에 비속어를 쓰는 등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어요. 키도 150센티미터대로 알려져 있을 만큼 신체적으로도 성장하지 못했고요. 어릴 적부터 시작한 체험형 음악 수업은 그를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시켰지만, 몸과 마음은 어린아이에 머물게 한 거죠. 특유의 밝고 경쾌한 선율로 많은 사랑을 받는 그의 음악은 어쩌면 그의 내면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가 아니었을까요?
프랑스 출신의 에릭 사티는 여러 면에서 괴짜였어요. 달걀, 설탕, 닭고기, 흰살 생선 등 흰색 음식만 먹었고, 언제나 똑같은 회색 벨벳 양복만 입었고, 100여 개의 양산과 80여 개의 손수건을 갖고 있었죠. 그리고 일평생 단 한 번 사랑에 빠졌는데, 채 반 년이 안 되는 교제 이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그 여인은 르누아르의 그림 ‘시골 무도회’에 등장하는 모델 수잔 발라동이었고요.
이러한 그의 독특함 덕분이었을까요? 음악 세계도 아주 파격적이었어요. 음악 자체가 절대적인 예술로 평가받던 그 시대, 사티는 ‘음악은 마치 가구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한다’는 음악관을 갖고 있었어요. 바로 ‘가구 음악(furniture music)’이죠. 심지어 자신의 공연에서 연주를 듣는 관객들에게 “제발 집중하지 마세요. 그냥 대화를 하세요.”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해요. 어쩌면 지금의 BGM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를 가미한 그의 음악은 뉴에이지의 효시라는 평가도 받고 있어요.
러시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을 명예롭게 졸업한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음악 영웅 차이콥스키가 공연 후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을 정도로 유망한 음악가였습니다. 게다가 키는 198센티미터에 이르고, 손 한 뼘의 길이도 26센티미터나 되어 그것을 활용해 엄청난 피아노 연주 실력을 보여준 피아니스트였어요. 그가 작곡한 곡들은 그만이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만큼 음악의 흐름과 전개가 깊고 풍성해질 수 있었죠.
라흐마니노프가 활동한 20세기의 예술은 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시도와 전위적 표현이 넘쳐나던 당시, 라흐마니노프는 19세기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고수했어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을 지향한 거죠. 그런 그를 향해 비평가들은 고인 물이라며 혹평을 했지만, 10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음악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클래식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예술의 본질에 집중한 결과죠.